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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악어씨, 부디 행복하시길 [ 최정선 / 한국일보 20170928 ]
    별점 :
    작성자 : 그림책박물관
    2017-10-18
    조회수 : 750

    미디어 : 한국일보

    원문 : http://hankookilbo.com/v/6174fe7a4b164b48bf89e4a1d2bb5092

    필자 : 최정선. 어린이책 기획자

    등록일 : 2017.09. 28

     

    동물원에서 태어나 18년 동안 동물원에서만 살다 죽은 호랑이 기사를 읽었다. 어미 대신 사람 손에 자랐기에 사육사 앞에서 뒹굴며 애교를 부렸고, 근친교배로 태어난 탓에 눈은 사시요, 걸음걸이도 편치 않던, 시베리아 근처에도 가 본 적 없는 시베리아호랑이가 번식기라 예민해진 동료에게 물려 죽었다. 우리 안으로 떨어진 세 살 아이를 데리고 있다가 사살당한 고릴라 이야기도 읽었다. 아이의 안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해명, 비운의 고릴라를 추모하는 여론, 잠깐의 공백, 빈자리를 메울 새로운 고릴라의 등장. 진부한 각본이다. 동물원은 종의 싸움에서 진 동물들의 포로수용소다.

    ‘악어 씨의 직업’을 읽는다. 눈에 띄게 긴 판형, 펼치면 가로세로 3:1 비례의 화면이 크고 작은 컷들로 오밀조밀하다. 글은 없다. 평범한 아파트 침실, 요란한 알람 소리에 악어씨가 잠을 깬다. 아침 7시. 통나무 베고 누워 유유자적 별빛을 즐기던 건 지난밤 꿈이다. 후다닥 몸을 일으켜 출근 준비를 한다. 변기에 앉아 끙끙대고,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고르고, 식탁에 앉아 뻑뻑한 빵에 잼을 바른다. 윗집도 아랫집도 옆집도 별다를 바 없는 일상, 도시의 아침이다.

    트위드 코트에 중절모를 챙겨 쓴 악어씨가 집을 나선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누는 어색한 인사, 차들이 빠르게 오가는 거리, 끝없이 늘어선 상점들, 제 갈 길 가느라 바쁜 이들, 흙탕물을 튀기며 지나가는 자동차, 지하철로 향하는 거대한 행렬, 곳곳에 붙은 요란스러운 광고판, 지옥철 소리가 절로 나오는 열차 안, 아침마다 마주치는 얼굴들…. 너무나도 익숙해서 꼭 내 이야기 같은 악어씨의 출근길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이 책의 반전은 악어씨의 일터가 동물원이라는 사실. 예상치 못한 일격이다. 악어씨는 탈의실에 옷을 벗어 걸어 두고 우리로 들어가 유리벽 너머 관객을 향해 포즈를 취한다. 몸을 길게 뻗고 이빨을 드러내고. 신문을 보다가 전화를 하다가 나무에 매달려 포즈를 취하는 원숭이들 옆에서. 발칙한 상상력에 한바탕 웃고 나니 마음이 복잡하다. 자신을 연기하는 게 직업이라니, 이게 우리 삶이라니. 결국 우린 모두 밥벌이를 위해 자신을 내놓고 광대놀음을 하고 있는 걸까.

    결 고운 그림에 만만치 않은 속내를 감춘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엉뚱하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진짜 악어에게도 선택권이 있다면, 동물원 악어 노릇이 정말로 직업이라면, 저들도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 저녁밥을 해 먹고 밀린 빨래를 하고 TV를 보면서 저마다 제멋대로 시시한 일상을 보낼 수 있다면, 그러면 좋겠다고.

    최정선 어린이책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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